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에게 거절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이 땅에 가져 오신 하늘의 왕국(=천국)이 신비의 형태로 감추어지는 것을 앞선 글에서 간단하게나마
살펴 보았습니다.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구분해 보았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중첩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독립적으로 나누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유대인의 거절로
말미암아 이제 이방인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이 왕국에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태13:1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큰 무리 가운데서 말씀하셨지만, 해석은
마태13:11절에서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며 불의하게 편애를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보았듯이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바알세붑을 힘입어 행한 것으로 여기며 예수님을 거절하고 성령님을 훼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1에서 보듯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그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정말 예수님께 관심을 갖는 자들이라면 그 비유를 배우고자 예수님이나
제자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자신을 찾고 따르는 자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십니다.
3. 겨자씨 비유
마태13:31 분께서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라. 32 그것은 참으로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로되 자란 뒤에는 채소 가운데 가장 커서 나무가 되므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의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하시니라.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며, 다 자랐을 때 나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는데, 이는 큰 권세를 가진 것을 상징합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된 성경 구절을 찾아 봐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4: 10 내가 침상에서 본 내 머리 속의 환상들은 이러하니라. 내가 보니, 보라, 땅의 한가운데 한 나무가 있는데 그것의 높이가 높더라. 11 그 나무가 자라서 강하게 되고 그것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것의 모습이 온 땅의 끝까지 이르렀으며 12 그것의 잎사귀들은 아름답고 그것의 열매는 많아서 그 나무 안에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이 있고 또 들의 짐승들이 그 밑의 그늘에 있으며 하늘의 날짐승들이 그것의 가지들에 깃들이고 모든 육체가 거기서 먹을 것을 얻더라.
22 오 왕이여, 그것 즉 자라서 강하게 된 것은 왕이시니 왕의 위대하심은 자라나서 하늘에까지 닿으며 왕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르나이다.
이 나무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이라고 22절에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13:31 분께서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라. 32 그것은 참으로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로되 자란 뒤에는 채소 가운데 가장 커서 나무가 되므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의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하시니라.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며, 다 자랐을 때 나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는데, 이는 큰 권세를 가진 것을 상징합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된 성경 구절을 찾아 봐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4: 10 내가 침상에서 본 내 머리 속의 환상들은 이러하니라. 내가 보니, 보라, 땅의 한가운데 한 나무가 있는데 그것의 높이가 높더라. 11 그 나무가 자라서 강하게 되고 그것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것의 모습이 온 땅의 끝까지 이르렀으며 12 그것의 잎사귀들은 아름답고 그것의 열매는 많아서 그 나무 안에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이 있고 또 들의 짐승들이 그 밑의 그늘에 있으며 하늘의 날짐승들이 그것의 가지들에 깃들이고 모든 육체가 거기서 먹을 것을 얻더라.
22 오 왕이여, 그것 즉 자라서 강하게 된 것은 왕이시니 왕의 위대하심은 자라나서 하늘에까지 닿으며 왕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르나이다.
에스겔에서는 아시리아 사람을 백향목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31:3 ¶ 보라, 그 아시리아 사람은 아름다운 가지들과 그늘을 가진, 키가 큰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으며 그의 꼭대기는 굵고 큰 가지들 사이에 있었도다.
그렇다면, 나무는 이 땅에 나타난 큰 권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13장에서 이상한 점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 이처럼 큰 나무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도 씨는 말씀(19절)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좋은 징조로 해석해야 할 까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비유를 복음 전파로 인한 천국의 확장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살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자랐을 때 나물이어야 할 겨자씨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었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습니다. 이는
사탄이 기독교계라는 거대한 나무에 둥지를 틀고 자신의 보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4절과 19절을 보면 이 새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가 이미 세상에서 캐톨릭을 필두로 하여 권력 기관이 되어 버린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줄 알면서도 신앙의 원리를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적 욕망과 악들을 수용해 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계는 실상 세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이제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캐톨릭을 선두로 한 종교 통합운동을 통해 더욱 거세게 일어날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바빌론 신비의 종교의 모습과 그 결말을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이 땅에서 직접 통치하지 않으시는 동안, 즉, 왕의 부재 기간 동안 하늘의 왕국의 외적 형태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는 비유입니다. 외적으로는 신앙고백을 하고, 기독교계 안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가입되어 더 해 지지만, 실상은 그 곳에 사탄이 둥지를 틀고 있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원수들이 득실거릴 뿐입니다.
4. 가루 서 말과 누룩의 비유
마태13:33
그분께서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굵은
가루 서 말 속에 숨겨 넣어 마침내 전부를 뜨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시니라.기독교계가 이미 세상에서 캐톨릭을 필두로 하여 권력 기관이 되어 버린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줄 알면서도 신앙의 원리를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적 욕망과 악들을 수용해 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계는 실상 세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이제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캐톨릭을 선두로 한 종교 통합운동을 통해 더욱 거세게 일어날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바빌론 신비의 종교의 모습과 그 결말을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이 땅에서 직접 통치하지 않으시는 동안, 즉, 왕의 부재 기간 동안 하늘의 왕국의 외적 형태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는 비유입니다. 외적으로는 신앙고백을 하고, 기독교계 안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가입되어 더 해 지지만, 실상은 그 곳에 사탄이 둥지를 틀고 있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원수들이 득실거릴 뿐입니다.
4. 가루 서 말과 누룩의 비유
이 비유 역시 성경이 성경을 해석 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단어를 사용한 용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마태16:6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의 거짓 교리를 주의하라(12절)는 의미입니다. 마가8:15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고, 누가12:1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주로 율법주의, 즉,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회의주의로 부활을 믿지 않았고 천사나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혜롯의 누룩은 세상과 종교를 혼합한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5:6~8에서 묵은 누룩을 제거하고 순수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4~9에서도 누룩을 부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누룩을 “교리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 여러 제사법을 소개하는데, 특히 2장에서는 소제(음식헌물)를 먼저 소개합니다. 소제(음식헌물)는 다른 제사와 달리 짐승의 생명을 취하거나 피를 흘리지 않고도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헌물(=제사)입니다. 모든 헌물(=제사)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음식 헌물은 고운 가루를 드리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아름다움과 그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인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음식 헌물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린 그리스도를, 그래서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식 헌물에 누룩을 절대로 넣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레위기2:11에서 “너희가 {주}께 가져오는 모든 음식 헌물은 누룩을 넣어 만들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항상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수한 말씀에 다른 어떤 신령한 교리나 인간의 사상을 넣는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딱 한번 누룩을 넣는 헌물이 나옵니다. 레위기 23:6~14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흔들어 드릴 때에는 누룩을 전혀 넣지 않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첫 열매에 속한 것은 죄와 상관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흔드는 빵 두 개"로 헌물을 드릴 때(레23:15~17)에는 누룩을 넣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이 지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행2:1~4)이 임하셨는데, 성령을 받은 그들이 여전히 옛 본성(죄성)도 소유하고 있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룩이 복음이라면 상당한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복음 전파는 누룩 전파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저절로 음식 전체에 퍼집니다. 한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면 온 마을에 그리고 다른 마을, 옆의 마을 점차 온 나라에 자동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복음은 실패한 것일 것입니다. 즉, 복음의 목적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5:6~8에서 묵은 누룩을 제거하고 순수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4~9에서도 누룩을 부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누룩을 “교리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 여러 제사법을 소개하는데, 특히 2장에서는 소제(음식헌물)를 먼저 소개합니다. 소제(음식헌물)는 다른 제사와 달리 짐승의 생명을 취하거나 피를 흘리지 않고도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헌물(=제사)입니다. 모든 헌물(=제사)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음식 헌물은 고운 가루를 드리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아름다움과 그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인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음식 헌물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린 그리스도를, 그래서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식 헌물에 누룩을 절대로 넣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레위기2:11에서 “너희가 {주}께 가져오는 모든 음식 헌물은 누룩을 넣어 만들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항상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수한 말씀에 다른 어떤 신령한 교리나 인간의 사상을 넣는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딱 한번 누룩을 넣는 헌물이 나옵니다. 레위기 23:6~14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흔들어 드릴 때에는 누룩을 전혀 넣지 않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첫 열매에 속한 것은 죄와 상관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흔드는 빵 두 개"로 헌물을 드릴 때(레23:15~17)에는 누룩을 넣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이 지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행2:1~4)이 임하셨는데, 성령을 받은 그들이 여전히 옛 본성(죄성)도 소유하고 있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룩이 복음이라면 상당한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복음 전파는 누룩 전파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저절로 음식 전체에 퍼집니다. 한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면 온 마을에 그리고 다른 마을, 옆의 마을 점차 온 나라에 자동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복음은 실패한 것일 것입니다. 즉, 복음의 목적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4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벧후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2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세상 끝으로 갈수록 배교의 물결이 넘쳐 날 것을 예언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딤후4:3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4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벧후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2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와서, “가루 서 말”은 고운 가루로 드리는 음식 헌물로 볼 수 있는데, 가루는 단순히 사람의 음식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또는 흠이 없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엄히 경계하신 일을 이 여자는 순수한 생명의 떡에 온갖 악하고 부패를 유발하는 누룩을 넣어 변질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가루는 가라지(독보리)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곡식에서 얻습니다. 따라서, 가루를 거듭나지
못 한 온 인류로 볼 수 없습니다. 클라렌스 라킨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가루)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씨를 말한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교회가 오늘날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 것은
놀라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그리스
정교 그리고 개신교회인데 이들이 가루 서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가루는 거짓되고 부패한 교리 "침례에 의한 중생",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형상 숭배", "미사의
희생 제사" 등으로 심히 변질 되었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요?
교회는 결코 여자로 표현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한 처녀, 또는 신부로 묘사됩니다. 가루 서말에 누룩을 숨겨 넣는 여자는 바로 큰 바빌론(계17, 18장)이며, 이세벨(계2:20)이다. 계시록 17, 18장은 현재 진행되어 가고 있는 최종 상황을 잘 설명합니다. 이러한 누룩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룩이 지속적으로 팽창해 나가듯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혼합시키거나 빼내고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누룩은 온 덩어리에 퍼지게 됩니다. 악은 결코 약화되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더욱 악해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기독교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을 소유하고 계시는 동안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입니다. 방향은 하향 추세를 이탈하지 않을 것이며, 일단 막는 자가 옮겨지면 배도가 시작될 것입니다.
앞선 비유들은 매우 일관성 있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룩은 한결같은 악의 발전을 상징합니다. 좋은 씨를 뿌렸으나 나쁜 씨가 뿌려졌고,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며, 작은 겨자씨를 심었으나 종국에는 마귀가 들끓는 나무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어야 할 순수한 음식에 변질 된 것들을 넣어서 오늘날 기독교계의 모습이 세상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바벨론 포로가 된 것처럼 기독교가 거짓 누룩에 오염되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필요하고, 심판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다 진실하여 우리에게 순전한 복을 가져다 줍니다.
이 4가지의 비유들은 큰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세상이 총체적으로 맞게 될 상태, 즉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4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무리를 떠나 집에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36절)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들은 단지 외적인 역사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즉, 외적인 혼돈과 폐허 속에서도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요?
교회는 결코 여자로 표현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한 처녀, 또는 신부로 묘사됩니다. 가루 서말에 누룩을 숨겨 넣는 여자는 바로 큰 바빌론(계17, 18장)이며, 이세벨(계2:20)이다. 계시록 17, 18장은 현재 진행되어 가고 있는 최종 상황을 잘 설명합니다. 이러한 누룩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룩이 지속적으로 팽창해 나가듯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혼합시키거나 빼내고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누룩은 온 덩어리에 퍼지게 됩니다. 악은 결코 약화되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더욱 악해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기독교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을 소유하고 계시는 동안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입니다. 방향은 하향 추세를 이탈하지 않을 것이며, 일단 막는 자가 옮겨지면 배도가 시작될 것입니다.
앞선 비유들은 매우 일관성 있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룩은 한결같은 악의 발전을 상징합니다. 좋은 씨를 뿌렸으나 나쁜 씨가 뿌려졌고,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며, 작은 겨자씨를 심었으나 종국에는 마귀가 들끓는 나무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어야 할 순수한 음식에 변질 된 것들을 넣어서 오늘날 기독교계의 모습이 세상과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바벨론 포로가 된 것처럼 기독교가 거짓 누룩에 오염되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필요하고, 심판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다 진실하여 우리에게 순전한 복을 가져다 줍니다.
이 4가지의 비유들은 큰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세상이 총체적으로 맞게 될 상태, 즉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4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무리를 떠나 집에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36절)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들은 단지 외적인 역사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즉, 외적인 혼돈과 폐허 속에서도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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