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2:17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히 2:18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감미롭고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그들의 죄와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피조물의 위치로
내려 올 수 있단 말인가! 이 위대한 진리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경건의 신비이다!
죄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처해진 운명으로 인해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우리를 위해, 천사의 본성이 아닌 아브라함의 씨 곧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주님은 인성 속으로 들어 오셔서 자기 형제들 곧 우리와 같게 되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혈과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혈과 육을 입고 오셨는데,
그 목적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하나를 이루기 위함이다.
성육신 하신 목적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우리를
사망 권세와 마귀로부터 구출하기 위함이다. 두번째는, 성육신
하신 주님 자신이 인간으로써 온전케 되어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곧 생명의 길을
열기 위함이다. 세번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편에서 서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때에라도 중보하시면서 우리를 주님과 온전한 하나로 연합시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네번째는 형편없는 우리를 받아 주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다.
본문은 세번째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제사장은 아무나 스스로 그 직분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담당할 수 있다(히5:4).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안수 복음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을 제사장으로 부르시지 않았고, 대언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침례자 요한을 일컬어 가장 높으신 이의 대언자라 불리리라(눅1:76) 라고 하였고, 예수님
역시 요한을 제사장이 아닌 대언자(눅7:28, 눅16:16)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자 요한을 제사장이라고
표현한 곳이 없다. 즉, 침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침례가
안수가 아니며 죄를 넘길 수도 없는 것이다. 요한은 대언자였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요한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고 대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분별한다면 안수 복음이 설 자리가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시고,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마귀의 권능이 우리를 덮지 못하도록 우리를 그분의 교제 안에서 지키시며 그분의 권능으로 덮으신다.
대속의 실제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매일 매일 알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분의 신성은 그분의 확실하고 불변하는 임재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며, 그분의
인성은 그분의 동정과 긍휼로 우리를 중보하신다.
우리가 그분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신 분인지 맛보아 알았다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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