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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9.

안수 복음의 오류에 대한 소고



최근에 어떤 형제님께서 안수 복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오셨습니다.

모 단체에서 나오신 분들이 아직도 안수복음을 신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안수복음의 오류에 대해 체계적으로 검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저보다 먼저 안수복음의 오류에 대해 언급하신 분들이 많은데, 예전에 그분들의 글(어디서 누가 쓴 글인지, 들었는지 모두 밝히지 못하는 점 양해를 구합니다)을 읽었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리고 제가 생각해 오던 것들을 망라해서 정리해 봅니다.


안수 복음의 핵심은,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 인류의 대표인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온 인류의 죄를 넘겼다는 것입니다(사실 그들의 책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그들의 설교 등을 일일이 제시해야 하지만글이 너무 길어 지므로 핵심만 언급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과연 성경적인지 하나씩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1. 침례자 요한은 제사장인가?  대언자인가?


그 단체 사람들은 요한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제사장이라고 생각한다. 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아론의 후손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서 취한다는 의미는 그 백성들을 위해그들의 죄들로 인한 헌물을 드리는 자로써 그 자신도 연약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는 태도로 하나님께 긍휼과 용서를 바라면서 나아가는 직분을 담당한다는 의미이다. 이 대목에서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육체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혈과 육에 참여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조차도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5:5) 되셨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요한을 제사장으로 부르신 적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성경은 구약의 예언부터 신약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대언자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당대의 유대인들 조차도 요한을 대언자로 확신했다(20:6)


제사장인가 대언자인가가 왜 중요하냐면, 제사장이 아니고서는 제사장 직분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수복음이 거짓 가르침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서 지정하지 않은 사람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고 주장하지 말라. 규정을 어기고 자기의 향로로 이상한 불로 드렸다가(26:61, 3:4, 10:1) 죽은 나답과 아비후를 떠올려 보라.


(7: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얼굴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길을 예비하리라, 하신 말씀이 가리키는 자가 곧 이 사람이니라.

( 7:2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대언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니라, 하시니라.


구약에서는 사자(messenger), 신약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그를 대언자(prophet)라고 말씀하셨다. 침례인 요한을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거나 그런 뉘앙스로 표현한 곳이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요한을 제사장으로 볼만한 구절이 전혀 없다는 것은, 대언자 이외에 다른 직무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임명 하지 않은 대제사장직을 누구 마음대로 자신들의 해석에 따라 임명하는가?



율법에 따라 모든 제사장들은 레위 곧 아론의 후손에서 택함을 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대로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맡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서는 결코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다.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통해 완전함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론의 계통을 따라 부르심을 받지 않고 멜기세덱의 계통(7:11)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그 단체의 재복음반이라는 곳에서, 침례인 요한의 안수를 통해 제사장 직분도 예수님께 넘겼다는 황당한 주장도 했었다고 한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결코 율법을 따라 온 건이 아니다. 물론, 구약의 율법, 제사법, 절기 등이 많은 요소들이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고 가리키는 그림자이고 모형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따라 오신 것이 아니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성경을 어설프게 공부하기 때문에 도달한 결과이며, 그들의 수장인 박P의 의견에 토를 달 수 없는 조직의 구조 때문에 다른 이견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수정을 못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3:21)
 
대언자들이나 율법이나 구약의 여러 모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가리키고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따라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육신에 속한 명령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시고 무궁한 생명의 권능에 따라 되셨(7:16).
 
이처럼, 안수 복음은 인간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짝퉁 복음이며, 자신들의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평가절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제사장과 대언자의 역할


제사장은 백성들의 연약함(죄들, 범죄, 부정함 등)을 속죄하기 위해 백성들 편에서 서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반면, 대언자들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자(messenger)의 역할을 한다. 그들은대언자 = 제사장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한결 같이, 사자로써의 역할을 수행했지 단 한번도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 적이 있는가?



3.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인류의 죄를 넘기기 위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위해 속죄 헌물을 언제 드렸는가?


제사장은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위한 죄 헌물을 드리기 전에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먼저 자신과 자기 집을 위해 속죄(16:6)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에서 죽게(16:2)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언제 자신을 위한 속죄 헌물을 드렸는가?

자신을 위한 속죄 헌물을 드리지 않고,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가?


죄를 넘기는 장소가 단 한번이라도 성막이 아니었던 적이 있는가? 요단강에서 죄를 넘겼다는 주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4. 침례가 안수인가?


그들은 대언자가 제사장이라고 우기는 무리수를 둘뿐만 아니라 이제는 침례가 안수라고 우긴다. 개역성경에서는 침례를세례라고 번역함으로써 오해할 소지를 갖고 있지만, 침례가 안수로 해석된 성경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침례를 안수라고 하자.. 그런데, 구약에서 짐승들을 헌물로 드릴 때, , 죄를 넘길 때 양이나 염소나 소를 침례시켜서 죄를 넘긴 사례가 있는가?

반대로, 안수할 때 물속에 잠기는 사례를 본적이 있는가?

안수복음은 침례와 안수도 구분 못하는 신학적 지식의 결여로 만들어진 결과일 뿐이다.



5. 요한의 침례의 의미


요한의 침례의 목적은 성경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와 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할 목적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는 침례를 베풀었다(3:11, 1:4)


하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 하늘 왕국의 개념을 잘 구분하고 이해하시는 분들은 요한의 침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런 오해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랜 기간 말씀하지 않으셨다. 긴 침묵이 지속되던 어느 날, 한 대언자가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3)”


구약 성도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시며, 드디어 곧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므로 백성들은 회개하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복된 소리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왕을 맞을 준비를 위해,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다.


사실 침례는, 기독교에서 먼저 유래한 것이 아니다. 침례는개종자 침례(proselyte baptism)”로 알려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행해진 침례가 있었다(참조: 그리스도인의 침례, 알프레드깁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먼저 밀라(혹은 할례), 그 다음은 테빌라(물속에 잠김에 의한 침례), 세번째 코르반(corban) 또는 짐승으로 헌물을 드렸다. 이러한 관행은 예수님 당대에서도 잘 알려진 관행이었다. 침례 요한이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외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한의 침례에 복종하는 것은자신들의 삶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요한의 침례는 왕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요한이 예수님께 베푼 침례를 통해, 오실 메시야가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는 귀한 사역을 담당한 것이다.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그분 위에 머무셨더라.

(1:33)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게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누구에게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바로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니라, 하셨기에

(1:34) 내가 보고 이분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6. 예수님께서 요한의 침례에 순종한 의미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죄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 자신의 편에서 볼 때, 침례를 받아야 할 어떤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한결같이 우리와 같이 죄 있는 모양으로 오셨지만(8:3) 죄는 없으신 분(4:15)이시다.

요한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침례에 복종하심으로써모든 의를 이루셨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주님께서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승인해 주셨고, 친히 그 침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 자신을 이스라엘의 건장한 남자들과 동일시하셨다. , 주님의 사역은 대언자(3:22,23), 사도(3:1), 대제사장(3:1, 5:10), 메시야(그리스도: 16:16), (2:2)으로써 오셨을 뿐만 아니라, 참 인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써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완전하게 행하심으로써 모든 의를 성취하신 것이다.

이렇게 성취하신 의는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전가된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 된다(3:27).


그러나, 그들은모든 의를 이루는 것세상 죄를 넘겼다고 해석한다. 아마도 난독증을  앓고 있든지,... 아니면 안수복음을 너무 많이 들어서 쇄뇌된 듯 하다.




7. 세상 죄를 넘겨 받는 다는 것의 의미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다. 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59:1)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 아버지와 성령님께서 함께 임하셨다. 세상 죄가 있는 그곳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성경적 진리와 모순된다.

유대인들은 오신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증거했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그 증거에 인을 쳐주셔서 그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심으로써 유대인들이 믿을 수 있는 표적을 주신 것이다. 얼마나 친절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신가! 이 부분을 잠시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피조물인 인간을 배려하시고, 인간들에게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 주셨는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시편 22편을 읽어보라..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들과 형벌이 그분께 옮겨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의 기도는 항상 아버지께 상달되었고 응답되었다. 요한의 침례가 세상 죄를 넘기는 것이라면, 3년 반 동안 어떻게 하나님과 상호 내주하실 수 있겠는가?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도 하늘에도 계셨고, 아버지의 품속에도 계셨다(1:18, 14:10.영어 표현을 보라! 현재형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이 온 세상 죄를 품고 가능했을까?



8. 이튿날

그 단체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신 다음날 요한에게 다시 보이셨다고 주장한다. 다음 구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한다.


1:29) 다음 날(The next day)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 [어린양]을 보라.


영어 표현 The next day는 어떤 특정한 날의 다음날을 지칭한다. , 침례 받으신 날이라고 볼 수 없다. 다음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1:11)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1:12) 성령께서 즉시(immediately) 그분을 광야로 이끌고 가시니라.


주님은 침례 받고 물에서 올라 오신 후, 성령님의 인도로 즉시 광야로 이끌리셨고 거기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요한에게 다시 나타나신 시점은 적어도 40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9. 인류의 대표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뿐이다


요한은 율법과 대언자들 시대의 마지막 주자(16:16)이다. 다른 모든 대언자들은 오실 메시야를 증거했지만, 요한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야를 눈으로 직접 친견하면서 증거하였다. 사실 친견하면서 증거할 수 있는 놀라운 직무가 주어졌기에 큰 자라 칭함을 받은 것이다. 


(11: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니라.

(11:11) Verily I say unto you, Among them that are born of women there hath not risen a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notwithstanding he that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요한보다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당시까지의 과거 시제이다. 요한은 위대한 대언자였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신부가 되지는 못했다. ,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화평과 기쁨인데, 거듭남을 통한 구원에 속하지 않았다(요한이 구원 못 받았다는 이야기기 아니다. 그 역시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신부에 속하지 못했음). 신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작은 지체들이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성경에서는 살아 있는 혼(soul)인 아담과 살려주는 영(spirit)인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대표성을 갖는다.



10. 지고 가는 vs. 제거하는


개역성경에는지고 가는으로 오역되어 있다. 바른 성경에는 “take away(제거하는)”으로 되어 있다. 주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의 죄들의 형벌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sin = 죄성)까지도 제거하실 분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현재적으로 죄의 권능(sin)으로부터 해방(away) 받을 수 있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 몸에서그 죄(sin)를 영원히 제거(away)하실 것이다. 이 구절은 예언의 이중성을 내포하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속죄 사역을 통해 우리가 받아야 할 죄들의 형벌뿐만 아니라 영원이 죄를 제거하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구원의 3중적 시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1:29)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 [어린양]을 보라.


이 말씀이 세상 죄를 예수님의 등에 짊어지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셨으면, 왜 세상에는 아직도 죄들이 넘쳐나고 있는가?



11. 십자가 사역(대속)은 주님의 배타적 독점적 사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죄들을 넘겨 받으실 때,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7:26)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울부짖었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불법들을 주님께 담당시킨 것이다(53:6).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 순간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5:21).


이 십자가 사역은 성삼위 하나님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역이다. 그래야 우리의 구원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죄가 있고 불완전한 인간을 개입시키는 것은 구원의 완전성을 현격하게 저하시키는 것이다.


침례자 요한이 죄를 넘기는 것이 안전하겠는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우리의 구주께 담당시키는 것이 안전하겠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믿으시렵니까?


아버지께서는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고(53:6), 주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아버지께 희생/속죄 헌물로 드리셨고(9:14),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영원한 구속(9:12)을 얻으셨다.


그들은 왜 이 구속 사역에 사람인 요한을 개입시키려 하는가? 그들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하나님의 종이 있어서 중간 역할을 한다는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들이 종의 교리(3:7을 주로 인용)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신약 시대에는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딤전2:5)뿐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 앞에 종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친히 우리 안에서 사시며, 위로하시며 힘을 주시고, 동행하시기 위함이시다.



12. 인류역사 가운데 가운데 안수 복음을 전한 전도자나 거듭난 무리가 있었는가?


그 단체의 홈페이지(http://goodnews.or.kr/info/mission04)에 보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마르틴 루터, 요한 웨슬리, 챨스 스펄전, 존 칼빈, 챨스 스터디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선진들은 과연 안수복음을 전했는가? 필자가 이 분들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상당한 책들을 살펴 보았으나 안수복음을 전하는 분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2천년 교회사 가운데 성령님께서 주무시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그 단체에게만 안수복음을 계시해 주셨단 말인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보라!

자신들의 복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언급한 선진들이 남긴 신앙 서적들을 탐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제발 책 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는 성경 해석을 할 때 앞뒤 문맥, 나아가 성경 전체의 흐름에 위배되게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성경 말씀이 정말 그러한지 살펴본 후에,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을 해서도 안되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해야 한다(고후13:8)”


아무쪼록 본 글이 진리를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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