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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29.

모임의 원리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종파와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모임의 다양성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임(교회)를 형성하는 원리는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모임의 원리들을 성경에서 다양하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 중에서 다음 몇 가지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경배했고, 유대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경배했습니다.

신약 성도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모일 수 있으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니라.(마18:20)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분의 권위 아래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특정 단체나 특정 사람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누구와 함께 하는 여름 수양회, 00와 함께 하는 성경 세미나 등등 이런 이벤트성 모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형성할 때도 어떤 특정 사람의 권위나 교단 아래에서 교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시대의 보편적 특징일 수 있으나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이나 교단 중심의 모임 형태는 어떤 사람을 신격화하는 우상숭배나 니골라당으로 넘어갈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는 범죄입니다.

 

2. 구약에서의 모임의 원리와 비교 :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려고 하신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년에 3차례 주님께 경배하러 올라 갔습니다.

 

신 12:5. 오직 {주} 너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실 곳 즉 그분의 처소를 찾아서 거기로 가서

신 12:11. {주} 너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시리니~

 

그러나, 원리상 구약의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원리는 신약과 동일한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임의 원리를 제정하셨고, 그 모임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셨기에 구약에서는 “주의 명절들(레23:2)”이라고 하셨고, 주께서 친히 “나의 명절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그래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버린 명절은 더 이상 주의 명절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명절(요5:1, 6:4)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사람 중심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임재는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하던 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분의 권위 아래에 모여야 진정한 경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안에 경배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바른 교리를 설파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없는 모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3.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

경배의 핵심 요소는 “영과 진리”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이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경배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경배를 드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경배는 아닙니다.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경배할 수 있습니다. 경배의 요소에 개인의 간증이나 자랑이나 사적인 일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합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고 교리(말씀)로 오직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경배입니다. 경배는 내가 은혜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으로써 주님께 헌물을 드리며 섬기며 경배하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경배 시간에는 사람을 세우거나 비난하거나 다른 목적이 개입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중심이어야 하고 주님만 높이고, 바른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참된 경배가 회복될 때,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약속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성소에서 섬겼을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듭난 신자들은 신약 시대의 제사장들로서 각자가 하나님께 어떻게 섬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경배가 회복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길 기도합니다.

 

2019. 1. 21.

마음을 넓게 열라(겸손)



(고후 6:11) 오 고린도 사람들아,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려 있고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나니

(고후 6:12) 너희는 우리 안에서 좁혀지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속 중심에서 좁혀졌느니라.

(고후 6:13) (내가 내 자녀에게 하듯 말하노니) 이제 너희도 같은 것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을 넓게 열라.


최근에 신자의 삶 속에서 마음을 넓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낍니다.

이 말이 아무 생각 없이 분별도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부요함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가 나름대로 신앙하면서 배워오는 동안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형성된 필터들(판단의 기준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조금만 다르면 내 안에 형성된 필터들이 작동하여 모두 걸러내 버립니다.


이러한 태도는 여러 배타적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우리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순수한 태도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것은 매우 권장해야 하며, 이러한 순종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요14: 15, 23, 요15:14)입니다.


문제는 잘못된 동기로 올바른 일을 행할 때입니다. 은사를 주신 순수한 목적인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엡4:12)에서 벗어난 다른 모든 동기에서 비롯될 때 잘못된 동기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거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옳은 일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하나님의 말씀의 수준까지 높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어떤 법들은 성도들을 세우기 보다는 정죄하는 데 활용이 되곤 합니다.


율법주의는 마음의 태도와 밀접합니다.  성경적이든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든 자신을 세우거나 높이기 위해서 어떤 규칙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해서 올바른 관점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는 어떠했습니까?


(마 23:5) 도리어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하나니 곧 그들은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며 자기들의 옷단을 큼직하게 하고

(마 23:7)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랍비여, 랍비여, 하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자기 영광입니다. 이들이 갖는 주된 특징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율법주의의 뿌리는 자기교만이고 그것의 열매는 자기만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규칙을 엄격하게 잘 지켜 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고 쓰레기통처럼 더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떤 탐욕(자신의 사역이든, 자신을 옳게 보는 것이든 외적으로는 깨끗하게 하지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마23:25).

이처럼 율법주의는 뭔가 외적으로는 무엇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황폐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의 실체를 누리기 보다는 형식적인 모양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보다 중요한 문제는 무시한 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마23:23~24).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없고 자신이 세운 규칙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의 특징은 가혹한 영과 은혜가 결여된 독단주의를 드러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율법주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가장 하기 어려운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단어를 쉽게 거론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이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겸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자신이 어떠한 자(얼마나 무가치한 자였는가!)였는데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찮은 무익한 종의 섬김일 뿐입니다.


우리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그분께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에 온유와 겸손이 묻어 나오지 않고 있다면,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사상으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엡4:15)”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틀에다가 말씀을 일치시키려는 어떤 태도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좁은 마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순종하는 자들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미 6:8) 오 사람아, 그분께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2018. 7. 1.

성경이 말하는 행복한 자


7월2일. 첫 주 월요일. 태풍 소식이 있네요.

태풍이 우리에게 큰 위협을 가져오지만, 이 태풍으로 지구를 정화시켜주고, 바다속의 미네럴들을 재분포함으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실 태풍이 주는 경제적 손실보다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그 유익이 크다고 분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도 크고 작은 태풍들이 있음을 항상 봅니다. 이러 저런 태풍을 지나면서 한층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길 소망해 보는 아침입니다. 7월 2일. 잠언2장 속에서 얻는 교훈이 있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글을 올려 봅니다.

 

(잠 2: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내 말들을 받으며 내 명령들을 네게 감추어 두기를 원하여

(잠 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쏟으며

(잠 2:3) 참으로 지식을 따라가며 외치고 명철을 얻으려고 네 목소리를 높이며

(잠 2: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잠 2:5) 그때에 {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

(잠 2:6)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그분의 입에서 지식과 명철이 나오기 때문이니라.

 

위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들은 능동형입니다. “받으며, 기울이고, 쏟으며, 높이며, 찾으면 등” 또한 이 구절은 “만일 ~ 하며” 형식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말해 준다고 봅니다.

어떤 구원파 단체의 성도들은 심각한 피동성에 빠져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하게 하셔야 한다. 신앙은 쉽다. 구원을 받으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앙은 대가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이 안되니까 “잘 한다”는 종에게 배워야 하고, 종에게 속해야 한다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그냥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인격(혼)의 자유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까지가 신앙인 것이죠.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순종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절대적 믿음에 근거했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시고, 거룩하시며, 우리를 위해 가장 안전하고/복된/선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God is Good.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목적은 항상 실제적인 순종을 위해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얻은 지식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지식을 배우면, 남을 가르치는데 사용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는 쉬어도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다는 생각을 합니다. 배운 지식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가르치는 자 역시 자신의 가르침(말씀)을 먼저 자신에게 비취고 순종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정확하게 분별해서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참된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 13:17)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그것들을 행하면 행복하니라.

 

2017. 9. 30.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요 13:12 이처럼 그분께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옷을 입으신 뒤에 다시 자리를 잡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과 [주]라 부르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니라.
요 13:14 그런즉 너희 [주]와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내가 너희에게 본보기를 주었느니라.
요 13:16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내어진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라.
요 13:17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그것들을 행하면 행복하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요한복음 12장과 13장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산출해내실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요12장의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 필요한 섬김, 교제, 경배, 간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13장에서는 주님께서 참된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분이다. 그런 분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몸에 두르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영광 가운데 계셔야 할 그 분께서 죄 많은 인생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을 어떤 인식으로 바라 보아야 할까!

이것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에서 행해져야 할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이다. 특별히, 제자의 길을 걷는 자들의 본보기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은 뒤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많은 사람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려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존심을 꺾어야 하고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과 [주]라 부르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니라.

주님께서는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써 그리고 만유의 주권자이신 주(Lord)로 이 일을 행하셨다.

요 13:14 그런즉 너희 [주]와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님께서 시청각 교육을 통해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발을 씻어 주라는 말씀이 실제로 물로 씻어 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용서하며 서로의 잘못을 서로 교정하며 세우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일을 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적 행복이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을까?


1) 요한 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요일 2:6 자기가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은 것 같이 스스로 또한 그렇게 걸어야 할지니라.

(주님께서 어떤 길이셨는지는 앞선 글에 이미 설명한 바 있으니 참고 바람)
또한, 주님의 자기 헌신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2)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한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

엡 4:32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3) 베드로 역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오도록 우리를 부르셨으니 마땅히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벧전 2:21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우리가 과연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 이러한 본보기를 보여 주시고 이 길로 초청하신 후, 14장에서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본성으로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겠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나를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오리라(요13:36)"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그 길을 갈 수 없음을 잘 아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 베드로가 성령님을 받은 후에는 따를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 안에 위로가 되시고, 평안이 되시고, 기쁨이 되시기 때문에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길이 험난하고 세상과 마귀와 우리 안에 역사 하는 죄성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위로부터 오는 힘과 안에서 올라오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처진 무릎을 다시 세울 수 있다.

또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의 모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 이후에 하나님 아버지 보좌 옆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중보 사역을 예표 하기도 한다.

성령님의 위로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힘입어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본보기의 삶을 오늘도 배우고 있다. 이제 돌 지난 아이처럼 비록 자주 넘어지면서 “난 못 하겠습니다 “하면서 푸념도 하고 하소연도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게 하시며, 그 길을 걷는 우리 안에서 또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 보시며 돕고 계신다.

이처럼, 요한복음 13장에서 발을 씻고 계신 주님이 오늘도 제 발을 씻고 계심에 눈물로 감사를 드리며, 장성한 자로 자라서 열매 맺는 삶으로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게 되길 소원하며, 오늘도 한 걸음을 걷습니다.

오늘도 미천한 자와 함께 해 주셔서..., 주(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 감사합니다.

2017. 9. 28.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요 14:17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라.

요 14:18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3장에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 제자 중 한 사람이 배반한다는 예언, 베드로 마저 주님을 부인하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게 된다.
 

이 때 주님은 마음에 근심 하지 말라고 위로 하신다.

그러면서, 저들에게 다른 위로자 곧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 달라는 간구를 아버지께 하신다. 주님의 승천 이후에 오시는 성령님은 신자들 안에 오셔서 함께 거하시면서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그리고, 주님 역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다시 와 계신다.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진정 이 말씀을 믿고 있는가?

 

왜 주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위로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고, 보내셔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우리가 위로 받아야 할 일들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성령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가?

 

우리에게 문제가 닥칠 때, 우리는 곧장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자문을 구한다. 교회 성도들은 담임 목사를 찾아 갈 것이다. 모 선교회 역시 “종에게 나아가서 교제를 받으라”라고 종용하며 그것이 믿음인 것처럼 깊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 예수님은 목사를 위로자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도 위로자로 주시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도 위로자로 주시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가까운 지인들, 가족들, 교회 형제들, 장로들과 대화하고 교제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참된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성령님을 위로자로 주셨기 때문이다.

만약, 신자가 위로자이신 성령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 자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위로 받을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마다, 목사를 찾아가거나 부모님을 찾거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좀 섭섭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데, 그분만이 참 평안을 주실 수 있는데, 그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오셨는데, 여러 분이 아는 척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구원 받은 신자라면, 당신 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위로자로 있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 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위로 없이 절망 가운데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지금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롬8:26)하시기에, 여러분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 앞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중보 하시기 위해 휘장 안으로 들어 가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히9:24)에 지금 계십니다.

 
단 우리의 기도나 구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요14:13)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자신의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분별하고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참조, 약4:2~3).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평강과 위로를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내가 곧 길이요,


요 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주님 자신이 아버지께 가서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이미 주님은 이전에 여러 차례 주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이미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며 그 길을 이미 너희가 알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도마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며 그 길도 모른다고 하였다(요14:5).

도마의 이 반문에 주님께서 요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라고 답변하셨다.

 
아버지께 가는 그 길을 도마에게 주님께서 친절히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주님은 바로 그 길(the way)이시다.

 
오직 주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주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별하신 길이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 안에 거하시는 관계를 이루고 계신다. 주님께는 아버지 앞에 나아갈 길이 필요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이미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길은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써 그 길을 여셨고 이제 누구든지(사람들이) 유일하신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 갈 수 있다. 지금 이 길로 오라. 반드시 와야 한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히 10:20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예수님은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시다.

예수님은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시다.

예수님은 지성소로 들어 가는 길이시다.

 
그러나, 그 길은 찾는 자가 적고 그 길이 좁다. – 실제로 그 길은 넓고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으나 죄인들 편에서 좁아졌고 버려지고 배척 당해서 찾지 않는 길이다.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시다.

 

고전 10:13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신자들이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능히 감당하고 피할 길을 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피할 길이시다.

 
 
또한 주님은 진리의 길(벧후 2:1~2), 바른 길(벧후2:!5)이시며, 의의 길(벧후 2:21)이시다.

 

우리를 아버지께 데려 가기 위해 몸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7. 1. 18.

주의 은총을 내게 베푸사


금윤정 찬양집에 있는 "주의 은총을 내게 베푸사" 란 찬송가 가사가 너무 은혜로워서 올려 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모는 믿는 신자들 위에 함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영원히 찬양한다고 한들 그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온전히 노래할 수 있을까?

오히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내게 아주 조금만 흘러와도 나는 충만으로 가득찰 것이다.

이 땅에서도 주님을 노래하며 즐거워하고, 주님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주를 노래하길 원합니다.

오늘도 나약한 나를 붙잡고 도우시는 주님,
주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주의 은총을 내게 베푸사

 
1. 주의 은총을 내게 베푸사 나를 구속하신 주님

그 은혜의 풍요함 나 그곳에 젖어들어

나 평생 주님위해 살 동안 값없는 그 은혜를

나 영원히 찬양해 나 주님께 모두 드립니다

자비와 그 용서함 내게 한없이 넘쳐나네

내 길 인도하시는 목자여 날 영원히 품에 안으사

주의 궁전에 나 들어가 영원히 주 얼굴보며

찬양 드릴 때까지 날 인도하여 주옵소서

 

2. 아름다워라 주의 궁전은 찬란한 저 시온도성

그 상아 궁 향 내음 주의 기쁨 되시는 곳

나 거기 주님 앞에 나아가 내 주님 두 손 잡을 때

주 날 안아주시리 내 눈물 닦아주시리라

날 위해 가시관 쓰신 머리 찬란한 왕관 쓰시고

날 위해 찔린 주님 두 손은 날 사랑하신 정표되었네

영원히 감사 찬송 드리리라 하나님의 어린양

영원히 영원히 그 은혜를 찬양하리이다

영원히 찬양하리라

 

2016. 8. 23.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2:16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히 2:17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히 2:18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감미롭고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그들의 죄와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피조물의 위치로 내려 올 수 있단 말인가! 이 위대한 진리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경건의 신비이다!

죄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처해진 운명으로 인해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우리를 위해, 천사의 본성이 아닌 아브라함의 씨 곧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주님은 인성 속으로 들어 오셔서 자기 형제들 곧 우리와 같게 되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혈과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혈과 육을 입고 오셨는데, 그 목적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하나를 이루기 위함이다.

 
성육신 하신 목적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우리를 사망 권세와 마귀로부터 구출하기 위함이다. 두번째는, 성육신 하신 주님 자신이 인간으로써 온전케 되어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곧 생명의 길을 열기 위함이다. 세번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편에서 서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때에라도 중보하시면서 우리를 주님과 온전한 하나로 연합시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네번째는 형편없는 우리를 받아 주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다. 본문은 세번째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취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들로 인해 예물과 희생물을 드리되 사람들을 위해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히5:1).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역할은 사람들의 부족함과 실수와 나약함을 잘 알고 이해하며 긍휼이 여길 줄 알고, 그들을 중보하기 위해서 사람들 편에 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다. 반면에, 대언자(선지자)들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사장은 아무나 스스로 그 직분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담당할 수 있다(히5:4).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안수 복음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을 제사장으로 부르시지 않았고, 대언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침례자 요한을 일컬어 가장 높으신 이의 대언자라 불리리라(눅1:76) 라고 하였고, 예수님 역시 요한을 제사장이 아닌 대언자(눅7:28, 눅16:16)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자 요한을 제사장이라고 표현한 곳이 없다. 즉, 침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침례가 안수가 아니며 죄를 넘길 수도 없는 것이다. 요한은 대언자였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요한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고 대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분별한다면 안수 복음이 설 자리가 없다.

 
성육신 하신 목적은 우리를 더 잘 알고 이해하고 우리의 어떠함을 잘 중보하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희생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충성되고 자비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또 한가지 놀라운 감사는, 주님 역시 죄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죄성을 가진 우리가 마귀의 유혹과 핍박이 얼마나 가공할 만 한 것이지 잘 알고 계시며,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이시기에 시험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그 시험과 고난의 길을 우리보다 앞서 가셨으며, 이미 체험하셨다.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인도자가 되신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매 순간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므로, 우리가 잊지 말고 해야 할 일은 그분을 앙망하며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자로써 주님을 아는 것은 물론 지금 매순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시고,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마귀의 권능이 우리를 덮지 못하도록 우리를 그분의 교제 안에서 지키시며 그분의 권능으로 덮으신다. 대속의 실제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매일 매일 알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분의 신성은 그분의 확실하고 불변하는 임재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며, 그분의 인성은 그분의 동정과 긍휼로 우리를 중보하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더 깊이 알고 앙망하며 언제나 그분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지하고 의지하며 그분께 도움을 구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분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신 분인지 맛보아 알았다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2016. 8. 21.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님


히 2:9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10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브리서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게 된다.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과 인격,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광스러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져 오는 영적 유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하나님의 정확한 형상이신 아들 하나님께서 천사보다 못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로 낮아지셔서 참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을 사시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완전한 화해 헌물과 속제 헌물이 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 보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완전케 되심으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셨고,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이 새롭고 산 길은 아버지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길이며, 자신의 온전한 사역을 통해 이제는 영광과 존위로 관을 쓰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 요한 역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그 교제 안으로 부르고 있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며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라.


구원은 우리 자신 안에나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에게 치유를 가져오고 영적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 앙망하는 것이다.
 

본래 세상은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세상에 복종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상의 왕이 세상의 종이 되도록 한 죄의 힘은 실로 가공할 만하다. 그 결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를 만드신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처지를 긍휼이 여기시고, 구원계획을 세우셨다.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속박에 매인 자들을 건져 내시는 데, 그 방법은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살과 피에 참여하시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하셨다. 이 방법은 참으로 신비롭다. 왜냐하면, 아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같이 천한 몸으로 오셔서 참 인간으로써 온전한 삶을 사셨고,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온전히 받아들여지신 사역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역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처지를 대신하여 온전히 이루신 대속 사역뿐만 아니라 참 신자의 삶으로써의 모범이다.

 
참으로 우리의 기쁨은, 이렇게 사람이 되셔서 인류를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이제 사람으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고 앉아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중보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머리(교회의 머리)이시다.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시며, 마침내 주님 자신처럼 우리를 영광과 존귀로 이끄신다는 약속을 바라볼 때,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삶 속에서 참된 위로가 되며, 인내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악한 현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세상이 풍기는 강력한 유혹의 힘과 내 자신의 옛 자아로 인해 쓰디 쓴 실패를 맛볼 때에라도 우리를 위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앙망하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내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실패와 불완전함에서 눈을 돌려 모든 것에서 완전하며 우리를 향한 신실함을 버리지 않으실 우리 구원의 대장을 바라보는 자는 복되다. 그 주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 놓으시고 손짓하여 부르시는 곳, 즉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에 참여 할 수 있게 된다.

고난을 받으시고 완전케 되셔서, 이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시요, 지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요, 친히 우리의 머리이신 분이시다.

이 주님을 굳게 붙들고, 깊이 생각할 때, 주님 안에 있는 평강과 승리와 한없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으로 갈 수 없었던 제자의 길을 따를 수 있는 힘도 공급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겸손과 온유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