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짧고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1~3장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를 다루고 있고,
4장은 교제 가운데 아주 유의해 할 거짓 영들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고,
5장은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 가운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유익들을
다루고 있다. 5장에서 좋은 교제로써 얻게 되는 것들은 1)영생의
확신 2) 세상을 이김 3) 형제사랑 4) 기도 응답의 확신 5)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음 6) 우상을 멀리함 등으로 요약된다.
요한일서의 핵심은 1장 1~4절이며, 나머지 부분은 1~4절을 각론적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요한일서1:1~4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기쁨을 얻는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들임을 제시하며, 5절부터는 그러한 교제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각론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 막는 요소들로는 1)어둠[죄(들)와 불의] 2)형제에 대한 미움(또는
형제 사랑의 결여) 3)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4)거짓된
교리(오류의 영, 영지주의)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신자의 삶에서 제거할 때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할 수 있고, 그러한 교제로 신자 안에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인 것이다.
다른 서신과는 달리, 요한은 인사말도 없이 곧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런데, 요한은 매우 특이하게 예수님을 제시한다.
요한일서1:1 처음에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요한은 마치 구원 간증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 품에서 만찬을 먹던 제자로 예수님을 만지고, 보고, 듣고, 살펴본 확실한 증인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함께 생선을 먹었던
제자이다. 자신이 경험하고 맛본 그 주님을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신자는 요한처럼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보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자들이다. 이 시대의 구원받은 신자들이나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동일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요한일서 1장의 앞쪽은 마치 신앙의 표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의 표준은, 반드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하며, 이 생명을 소유한 자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스도를 밝히 나타내고자 하는 속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에 참여하는 자로 세상의 기쁨이 아닌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다. 요한일서는 신자가 이러한 올바른 교제를 계속 유지하여 기쁨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필요한 실행적인 면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처음부터 이렇게 예수님을 제시하는 또 다른 목적은 뒤에 설명할 영지주의자들을 배격하기 위함이다. 당시에 나타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딤전3:16)과 몸의 부활을 믿지 않던 이단들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많은 이단들이 있다. 그들 중 여호와증인들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영으로 부활했다고 믿는다.
요한일서 1장의 앞쪽은 마치 신앙의 표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의 표준은, 반드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하며, 이 생명을 소유한 자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스도를 밝히 나타내고자 하는 속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에 참여하는 자로 세상의 기쁨이 아닌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다. 요한일서는 신자가 이러한 올바른 교제를 계속 유지하여 기쁨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필요한 실행적인 면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처음부터 이렇게 예수님을 제시하는 또 다른 목적은 뒤에 설명할 영지주의자들을 배격하기 위함이다. 당시에 나타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딤전3:16)과 몸의 부활을 믿지 않던 이단들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많은 이단들이 있다. 그들 중 여호와증인들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영으로 부활했다고 믿는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요일5:20), 이 분을 영접할 때 참 생명을 얻게 됨을 인사말도 없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은 처음부터 계신(1장1절) 분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하나님으로 영원부터 사역을 하고 계셨으며, 단, 그 사역의 중심이 십자가였다.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는 주들의 주요, 왕들의 왕으로 오실 것이다. 처음에라는 말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
먼 아득한 영원 전을 의미하며, 이 분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 역사 가운데 성육신 하셔서 한 인격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오심이 가시적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이 말은 영지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요한의 짧은 선포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음으로 얻은 그것을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이제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기를 갈망하고 있다(3절)
그렇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자의 특징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면, 자신이 듣고 맛본 그 구원을 불신자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요한이 보여준 본을 따라 사실 그대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Lord)는 말씀 하나님을, 예수는
성육신 하신 완전한 인간을,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의미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의미가 모두 들어 있고, 이름의 의미만 정확히 알고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를 계시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시켜 주시고자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이다.
“나”라고 하는 인생은
악한 현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문제와 죄들을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불쌍한 인생에게 본질적인 해결책이 무엇인가? 가장 옳바른
처방은 처음부터 계셨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주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시다. 이 분을 소유한 자만이 신적 생명을 가진 자이며, 이제 그리스도와
교제와 연합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을 가진 것이다. 이제 이런 교제를 통해 기쁨이 충만 할 수 있다고
사도 요한은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는 이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세상은 악한 자 곧 마귀에 처해 있으며, 마귀는 어떻게든 신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 핍박, 위협을 가하고 있다. 오히려 불신자 보다 더 큰 갈등과 고뇌 속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엄청난 표적을 보고도 타락했던 것처럼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도 세상에 넘어질
수 있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이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러한 기쁨을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혔기 때문이요,
교제가 막히는 이유는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답지 않은”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전혀 없는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지 않으면 교제가 막히게 된다. 하나님의 본성 중 으뜸은 “빛(=거룩)”이시다.
요한은 4절에서 서신을 쓰는 목적이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하면서 5절에는 갑자기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라고 선언한다. 우리의 상태를 보면서 이 말씀을 대하면 그 빛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어지는데, 요한은
이것이 기쁨의 충만을 얻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참다운 교제가 아니라 자기의 상상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다. 이것은 실제적
교제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상상 속의 교제일 뿐 하나님과 상관 없다.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6
만일 우리가 그분과 교제한다고 말하며 어둠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모 선교회의 경우, 구원의 신분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상태적 교제를
위해 "빛 가운데 걸어 가는 것"은 율법적이라고
우기며, 범하는 죄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자백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하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려서 사실상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지 않고 있다. 즉, 빛 가운데 걷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교제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말쟁이 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이다. 죄에 물든 육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조그만 한 그 어떤 것도 용납하실 수 없지만, 죄를
제거하는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을 수는 있어도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참된 교제는 양측의 교제 대상자들의 속성을 잘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어둠이 전혀 없으시며, 악을 보지 못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어떠한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현 악한 세상은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본질상 행악의 종자로 태어났고, 우리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고 심판 아래 놓였다. 자연인
그 자체로써 우리에게는 길이 없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는 주님을 참으로 의지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진리 앞에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래
우리 본성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하게 태어났지. 이렇게 무력하게 만들어 놓고 빛 가운데 걸으라고,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눈을 돌려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겨가 보자. 죄가 없었던 아담 역시 유혹에 넘어져 인류 최초의 범죄자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죄가 없이 태어났다면, 과연 악한 현 세상에서 의롭게 살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죄가 없이 태어났다면, 훨씬 더 엄중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셨기에 주님의 의를 믿는 자들 안에 값없이 은혜로 주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전가된 그 의는 우리 자연인이 이룰 수도, 만져 볼 수 도 없는 거룩한 의이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롬3:23)에, 우리들의
범법과 죄들(엡2:1) 때문이며, 그 결과로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물론, 아담의 본성인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쉽게 죄들을 지을 수 있지만, 지옥의
형벌은 죄성 때문이 아니라 지은 죄들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직접
이루시고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구원 받은 신자들이 범하는 죄들을 하나님은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우리에게 여전히 죄의 권능(=옛 본성, 8절)이 있음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그
육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내어 드린 것이다. 이 죄의 권능은 우리 육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아니하며, 마귀는
이 육신의 기회를 틈타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삶 가운데 지은 죄들(=범죄)을 실토하고 자백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자백은 불신자가 구원 받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신자가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구원받기 전의 불신자가 어떻게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성으로 똘똘 뭉쳐진 육신임을 알 수 있겠는가? 불신자가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겠지만 이런 각성은 오히려 구원 받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는 중에 자신의 어떠함을
밝히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 악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없으나 어두움이 전혀 없는 빛 되신 하나님께로 가면 갈수록 자신의 추함을 더욱 자세히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와 보다 온전한 교제를 위해서 빛 되신 주님 안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약 성도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베푸시는 축복이요, 하늘에
속한 복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며,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복인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영적인 축복에 깊이 참여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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