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예전에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어떤 분(이하 L씨라
표현함)과 구원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성경 역본의 차이에
따라 신앙관이 전혀 다르게 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 또한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이야기 했고, L씨는 점진적 구원론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알 수 없고 다만 우리 편에서 회개하면서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구원받기로 예정한 사람만 구원 받는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캘빈주의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회에서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칼빈의 5대 강령이 매우 설득력 있게 보이지만, 성경과 깊게 대조해 보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것을 다 글로 적기에는 지루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생략하고, 토론하면서 L씨가 제시한 문제점과, 개역성경 구절이 KJV와 어떻게 다른지 답변했던 것을 짧게 다시 정리하여 글로 올립니다. 함께
은혜가 되길 소망합니다.
1. 구원 받은 날과 시를 반드시 알아야 하나?
이것은 구원파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구원파의 잘못 된 교리와
실행이 많지만, 본 글은 구원파를 비판하기 보다는 L씨와의
토론에서 논쟁이 되었던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구원받은 날을 내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 자신이 구원받은 확증이 없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L씨는 구원하시는 주권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피구원자인 내가 감히 구원받았다는 표현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듯
하게 들립니다. L씨의 주장이 맞다면,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 모두 이단이 되고 맙니다.
한 예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요일 4:13)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4:14)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노니
(요일 4:1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할
자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6)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 믿었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5절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누구든지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여호와증인도, 신천지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니 구원 받았겠네요? 이런
질문은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무지한 소리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은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시고, 우리의 대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 자 안에 성령님을
주셨고,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을 받지 못 했다면 결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고전12:3)입니다. 물론, 입으로만 주라 고백하는 것을 구원이라 할 수 없지요.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피조된 신으로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한 신으로 믿습니다. 요한에 따르면,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씨(생명)가
우리 안에 들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구원에 관해 매우 다양한 모양으로 설명합니다. 영생을 얻었다, 성령에게서 태어났다(요3:5), 중생했다, 죄들의
사면을 받았다, 거듭났다 등등... 사도 바울은 주로 법리적 구속, 즉, 율법의 저주와 사망에서 벗어난 측면을 주로 이야기 하고 있고, 요한은
생명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양자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되어 가는 중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 와 있습니다(들어오는 중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
갓난 아이로 태어나는 것과 같고, 태어났으면 자라나야 합니다.
L씨가 주장하는 구원자의 주권은 이미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온 인류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불신자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한 속죄론은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을
불의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2. 빌립보서 2장 12절
(1)
개역한글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
영어 KJV 및 흠정역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빌 2:13)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빌 2:12)
Wherefore, my beloved, as ye have always obeyed, not as in my presence only,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빌 2:13)
For it is God which worketh in you both to will and to do of his good pleasure.
개역 성경에서 보더라도,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가 구원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다음 구절을 함께 보아야 뜻이 분명해 집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13절이 For로 시작합니다. 즉, 구원
받은 신자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러한 갈망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가 받은 구원을 나타내라는 의미입니다.
3. 베드로전서 2장2절
(1)
개역한글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2)
영어 KJV 및 흠정역
(벧전 2:2)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2:3) 너희가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2)
As newborn babes, desire the sincere milk of the word, that ye may grow
thereby:
(벧전 2:3)
If so be ye have tasted that the Lord is gracious.
벧전:2:2 역시 구원을 받기 위해 순수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곧 이제 갓난 아이로 태어났으니 개역한글로 보더라도, 너희가
갓난 아이로 태어났으니 자라기 위해서 젖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이란 의미로 해석하면, 이미 구원이라는 생명(갓난아이)이 태어났는데, 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니요, 스스로 모순입니다. 구원 받을 때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새사람은 반드시 말씀의 젖으로만 자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자라나라고
합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절대 아닙니다. 다음 구절 3절을 보세요.
"주께서 은혜로운 분이심을 맛보아" 알게 되었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음식이 있습니다. 꿀도 있고, 젖도 있고, 단단한 음식도 있고,
질긴 고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갓난 아이는
순수한 젓이 필요함을 베드로는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구원 받으면 죄가 없는가?
L씨는 영,혼,몸을 나누면 이단이라고 했는데, 성경에도 그러할까요? 아무리 변개된 NIV도 영어성경에서 영,혼,몸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 회수되며, 몸은 무덤으로 내려가고, 혼은 지옥이나 천국(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전 3:21)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누가 알리요?
(전 3:21)
Who knoweth the spirit of man that goeth upward, and the spirit of the beast
that goeth downward to the earth?
(전 12:7)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
(영,혼,몸은 또 다른 주제이므로 생략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우리 몸에서 죄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담이 물려준
옛사람 곧 죄성이 그대로 있습니다.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면~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했고, 사도 바울 역시 구원 받은 후에 사망의 몸에 갇혀 괴로워했고, 자신의 속에 죄가 거한다고 로마서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책이 해결되었고, 또한 법적(하나님의 판결)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실제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생물학적으로 우리 몸에서
죄가 제거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4. 회개와 자백
신자나 불신자나 회개가 필요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길이 잘 못 되었을 때,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신자라 하더라도 말씀에서 벗어나면 회개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이후의 회개가 다시 생명을 얻는 회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회심후의 회개는
아들로 합당하게 살지 못했을 때 돌이키는 것으로 불신자의 회개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최선의 상태에서도 헛것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그 참회의 눈물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른 참회의 눈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것은 회개하는
행위로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 주께 오면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요일1:9)에 달려 있습니다. 죄를 시인하는 것 자체가 회개가 아니며,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시인했지만 회개하지 않은 인물들이 성경에 여럿 나옵니다(예: 아간, 사울 왕, 가룟
유다, 요셉의 형제들 등). 회개는 버리고 돌아서는 것입니다(행14:15, 살전1:19).
5.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은 신약성도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또한, 세상을 거절할 수 있는 힘과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L씨는 여전히 구원의 확신은 자만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13:5에서도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버림 받은 자니라" 라고
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는 자는 구원이라 할 수 없죠.
(요일 2:20)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이요 또 어떤 거짓말도 진리에서 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기름 부음(성령) 받고
모든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의미를 오해할 수 있으나, 문맥에서 22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안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점진적 구원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난 것을 의미하며, 그 생명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6. 신자의 위치
거듭난 신자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죽었고(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또한 산 자(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두
개의 본성, 즉, 아담으로부터 받은 옛사람과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구원 받았지만, 사망의 몸을 지고 다녀야 하고, 악한
현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이것은 신비이며, 성령님의 조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죠. 우리의 생활방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배는 바다에 떠 있지만, 바다에 속한 것들이
배로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신자의 위치에 걸맞게 살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 결국 내가 육신이 처리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통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딛 2:11)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딛 2:12)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딛 2:13)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
L씨는 구원이 단번에 완성되면, 자만하여 도덕 폐기론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경각심 있게 들어야 할 말입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죄 좀 지어도 난 천국 간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 선교회를 비롯하여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이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성경을 오해하거나
그 단체 내에서 잘못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은혜를 받은 자들은 도덕 폐기론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있다면, 아마도 입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지 실제 거듭난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 디도서의 말씀에 따라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를 어떻게 가르친다고 했는지 보십시오.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게 합니다.
또, 그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타락의 길을 갈 때 두렵고 떨림이 있고, 비록 육신적으로 살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신자가 신천지에서 가르치는 성경공부에 혹해서 미혹을
받을 수 있으나,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거나 사람을 신격화는 교리를 듣고 그곳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처음부터 구원 받은 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요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요일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분명히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나간 것은 그들이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들은 한번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 온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곧 살과
뼈에 참여한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입으로만
신앙 고백한 자들인 거죠
7. 히브리서4:1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이 거기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노라.
히브리서 4장은 상당히 난해 구절입니다. 히브리서3장도 함께 읽고, 문맥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특히, 이 서신서가 히브리인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3종류의 안식(설명이
길어지므로 생략)이 나옵니다. 단순하게 1절만을 가지고 신약 성도의 구원이 안전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교리입니다. 영적 적용을 하여, 깨어있고 완전함을 향하여 나가가야 한다는 교훈은
얼마든지 배우고 가르쳐야 하지만, 단편적으로 교회시대에만 국한시켜 교리를 적용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4장에서 신약성도의 안식은 10절입니다. 신약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9절의 하나님의 백성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이라는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시셨지만, 그들이
믿지 못함으로 안식(가나안)에 들어 가지 못했던 것처럼, 교회시대가 끝나고 다시 유대인을 다루는 대환란 때, 이들이 믿지
못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 할 때 그들은 안식(천년왕국)에
들어 가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염려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영원히 버려진 것(지금은 마치
완전히 버려진 것처럼 보이지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약속하신 천년왕국이라는 안식이 그들에게 남겨져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그 민족에 하신 약속은 여전히 살아 있고,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하신
것을 폐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해석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쨋거나
성경의 수신자를 모두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언약 신약에 기초하는 것으로, 거기에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성경학자들이 아무리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제외시킬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어야 하고, 교회에 하신 약속은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을 입체적(예언의 이중성)으로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본 주제로 돌아와서, 구원의 확증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한 교리는 신약성도에게 주신 크나큰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다고 전부가 아니며, 자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L씨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구절들이 구원이 취소될 것 같은 내용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저도 성경을
읽고 공부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 보지 못 하면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성경인용은 흠정역 KJV를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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